
(경기뉴스통신) 연산 12년 9월, 하룻밤 사이에 왕이 바뀌었다. 폭군 연산군은 폐위되고, 왕실의 웃어른 자순대비의 허락으로 새로운 왕이 즉위했다. 조선 건국 이래 신하가 왕을 바꾼 첫 번째 사건이었다. 바로 중종반정이다.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연산군의 폭정. 이를 막으려는 움직임의 중심에는 박원종이 있었다. 왕족과 사돈을 맺은 명문가 집안의 무관(武官)으로, 성종에 이어 연산군에게도 신임 두터웠던 그였다. 그랬던 그가 반역, 아니 반정을?
“월산대군 부인 박씨가 죽었다. 사람들이 왕에게 총애를 받아 잉태하자 약을 먹고 죽었다고 말했다.”- <연산군일기>, 연산12년 7월
연산군 말, 민심이 흉흉해지고 그릇된 왕을 저지하려는 분위기가 조성됐다. 대신들은 폭정보다 역모가 두려웠다. 누가 먼저 왕을 끌어내릴 것인가? 누구의 뒤를 따를 것인가? 바야흐로 조선을 둘러싼 눈치싸움이 시작됐다. 박원종은 문무(文武) 모두 뛰어난 이장곤이 난을 일으킨다는 소문에 역사적 선택을 내렸다.
월산대군 부인 박씨는 박원종의 첫째 누이로, 당시 50세가 넘는 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연산군과 간통했다는 추문 속에서 세상을 떠났다. 박원종의 ‘그날’, 개인적 복수심에서 비롯된 것일까? <백성대토론>에서 당사자를 잠시 불러 직접 물어봤다.
결론적으로 중종반정은 상벌이 명확하지 못했다. 공신 책정에 있어서 공정하지 못했고, 적폐 청산도 완전히 되지 않았다. 박원종을 비롯한 반정 주도세력 역시 부패의 현재진행형이었으니! 거사는 이루었지만 청사진이 없었던 이들은 반만 성공한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이 사건을 ‘중종반정’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뭘까?
절반의 성공을 거둔 중종반정의 의의는 4월 15일 일요일 밤 9시 30분 KBS 1 TV <역사저널 그날> ‘중종반정은 누이를 위한 복수인가?’ 편에서 확인할 수 있다.
기사 및 사진제공 : KB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