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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연예

인간극장, 포도밭 울 엄니

(경기뉴스통신) 모처럼 쉬는 날이면 텔레비전 속 격투기 선수들을 따라
허공에 원, 투 펀치를 날리는 어머니가 있다.
시원한 초콜릿 음료와 함께
선수들의 찰진 타격 소리를 듣다 보면
저절로 스트레스가 풀린다는 임명복(70) 씨.
포도 농사에 있어선 베테랑 농부인 그녀는,
아들 셋, 삼 형제의 어머니다.

‘일 잘하는 아내를 만나고 싶다’는
남자의 가당치도 않은 구혼 앞에서
그녀는 무슨 배포였는지 그이를 천생연분으로 받아들였다.
그래서였을까,
땅 한 평 없이 곤궁했던 시집 살림을 차곡차곡 늘려가며
결혼 10년 만에 당신 땅을 갖게 됐다.
소를 먹이고 남의 밭을 부쳐가며
가난만큼은 자식들에게 물려주지 않겠다는
생의 목표를 이룬 셈이다.

그러나 기쁨은 순간순간이고,
슬픔과 시련이 삶의 본질이라고 했던가,
공사장 막노동 일을 하며 성실했던 남편이
뇌경색으로 쓰러져 10년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다.
삼 형제 중 막내, 이대겸 씨(39)가 귀농하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9년 차 농부, 대겸 씨에게 어머니, 명복 씨는
농사에 있어선 감당하기 버거운 상대,
모자는 지금 소리 없는 전쟁 중이다.
초생재배로 친환경을 시작한 아들과
제초제를 쓰던 당신의 농법을 고집하는 어머니,
게다가 50여 년 경력을 자랑하는 어머니의 캠벨 포도는
재배 농가가 많아져 수익도 줄고 점점 인기를 잃고 있다.
1~2년 수확이 줄더라도 신품종으로 세대교체를 이루겠다는
아들의 포부 앞에서 어머니, 명복 씨는
쉴 새 없이 손을 보태면서도 불안감을 감출 수가 없다.

충청북도 옥천군 개심 리,
4,000여 평의 포도밭에서
포도 향처럼 찐득하고 향긋한 어머니의 사랑,
모자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어머니, 명복 씨가 짠순이 여전사가 된 이유.

아직도 상수도가 들어오지 않는 마을, 충청북도 옥천군 이원면 개심리.
빗물을 받아 걸레질하고, 지하수가 모자랄 땐 빗물로 빨래를 할지언정,
명복 씨는(70) 불평불만을 모르고 살았다.

스물여섯에 집 한 칸, 땅 한 평 없는 집에
시집을 와서 소를 먹이고 남의 밭을 부쳐가며
그녀는 손발이 닳도록 일만 했다.
땅이 없어 일할 곳을 찾아다니고, 일할 시간이 부족해서 해 넘어가는 것이
가장 아쉬웠다는 그녀는 결혼 후 10년 만에 처음 자기 땅을 갖게 됐다.

비가 오면 흙투성이가 되는 초가에서 삼 형제를 키우며
결코 가난만큼은 아들 삼 형제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았단다.
농사보다는 공사장 막일이 적성에 맞았던 남편은,
성실했지만 농사일에 있어선 그녀만큼 적극적이진 않았다.
포도 농사가 꽤 수입을 올리던 시절, 그녀는 밤낮없이 일했고
자신을 위해선 한 푼도 쓰지 않는 짠순이 농부가 됐다..

33년 전, 아이들을 위해 빚을 내어 지은 양옥집.
그때 환하게 웃던 아이들의 모습을 그녀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집들이할 때 들어온 30여 년 전 세제를 지금도 쓸 만큼 근검절약이 몸에 뱄다.
그녀의 물건들도 골동품에 가깝다.
10년을 넘게 입은 블라우스며 일 바지, 언제 샀는지도
기억도 안 나는 화장품 몇 병, 조그만 상자 두 개가 그녀의 옷장을 대신한다.

하지만 후회는 없다.
당신이 땀 흘려 고생한 덕분에 장남은 읍내에 집 장만을 했고,
둘째 역시 편의점을 하며 남부럽지 않게 산다.
그리고 막내 대겸 씨는 자기 땅에서 아쉬운 소리 않고
포도 농사인 가업을 이어가고 있다.

할 말이 있어도 참고, 불평불만이 있어도
내색하지 않고 살아온 세월이 그녀에게 준 보상 같다.
드라마보단 격투기를 즐겨 보고, 스트레스가 쌓이면
밭일을 나가 해지도록 일하면서 스트레스를 푼다는 어머니, 임명복 씨(70),
항상 웃음이 많고 긍정적인 그녀의 고민은 뭘까?

어머니의 가장 아픈 손가락은 삼 형제 중 누구일까?

명복 씨의 남편은 뇌경색으로 쓰러진 후
치매와 암 투병 끝에 2년 전 세상을 떠났다. 꼬박 10년을 병상에 있었다.
병시중과 농사일을 명복 씨 홀로 감당하기엔 벅찼다.

도시에서 자동차 정비 일을 하던 막내 대겸 씨가 9년 전 귀농한 이유다.
꼼꼼한 성격에 자동차 전문학교를 나온 대겸 씨는 꽤 인정받는 기술자였다.
하지만 어머니를 닮아서일까?
9년 차 농부에 불과하지만 대겸 씬 정비일보다 농사일이 더 즐겁고 재밌다.
찬찬하고 꼼꼼한 성격의 그에겐 잔손 많이 가고 섬세한 포도 농사가 제격이다.
단지 어머니께 불효라면, 마흔이 코앞인데도 아직 장가를 못 갔다는 사실.

어려서부터 말썽꾸러기였던 둘째, 승모 씨,
어린 시절 개심리 화재 사건의 주인공이지만
지금은 어엿한 가장에 편의점 사장님이다.
삼 형제 중 유일하게 일찍 결혼하여 떡두꺼비 같은 손자 둘을 어머니에게 안긴 효자,
그러나 어머닌 둘째에게 가장 미안하다.
아직도 둘째의 어린 시절 비행(?)이 일하느라
잘 안아주지 못하고 사랑을 주지 못한 당신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장남 상민 씬 금속도금회사에 다니며 주말에도 쉬지 않는 성실남이다.
어려서부터 경기를 자주 해서 문턱이 닳도록
병원 문을 들락거리게 했던 장본인.
부지런하기론 어머니를 똑 닮았지만 2년 전, 이혼남이 됐다.
늘 걱정만 끼쳐드리는 것 같아 상민씨는 어머니께 늘 죄송하다.
아직 제 짝을 찾지 못한 두 아들과 사랑을 맘껏 주지 못하고 자라 여전히 안쓰러운 둘째,
어머니에게 가장 아픈 손가락은 누구일까?

세대갈등? 세대교체! 엄니의 포도밭엔 희망이 자란다

40년 가까이 포도 농사를 지었던 어머니 명복 씨와
어느덧 귀농 9년 차인 아들 대겸 씨는 소리 없는 전쟁을 치르는 중이다.
대겸 씨는 초생재배를 하는 친환경 농사를 택했고,
어머니 명복 씨는 아직도 풀이 자라는 밭은 농부의 수치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어머니가 40여 년 일궈온 캠벨 포도종은
재배 농가가 늘어나는 바람에 예전만큼 수익이 나질 않는다.

하우스 세 동 중 두 동을 이미 신품종 포도밭으로 교체했고,
나머지 한 동도 올해 안에 새로운 밭으로 갈아엎을 예정이다.
하지만 신품종 묘목을 키우자면 1~2년 수확량이 줄어드는 걸 감수 해야 할 상황,
지켜보는 어머닌 불안감을 감출 수 없다.

틈만 나면 아들의 밭에 농약을 치고,
묘목이 자라는 하우스에 고추며 오이, 가지 농작물들을 심는다.
대겸 씬 그런 어머니와 때때로 잔소리 전쟁을 벌이지만
자신과 형들을 키운 것이 어머니와 포도밭이란 걸 가장 잘 아는 사람이다.
고생을 덜어드리진 못할망정 오히려 고생을 더 하는 것 같아 늘 안타까운 대겸 씨,
그래도 그는 어머니가 가장 좋아하는 초콜릿 음료로 함께 건배하고
여름 냇가에서 어머니와 조약돌로 물수제비를 뜨는, 살갑고 다정다감한 아들이다.

올여름, 대겸 씨의 신품종 포도밭은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지만
첫 수확의 기쁨을 나누며 순조롭게 출발했다.
그리고 대겸 씨는 가장 바쁜 이 계절에 미모의 그녀와 핑크빛 연애도 시작했다.
포도 농사, 연애사업 모두 아들의 뜻대로 응원하고
지지해주는 ‘포도밭 울 엄니’가 있는 한,

모자의 포도밭엔 포도도, 사랑도, 언제나 주렁주렁 영글 것 같다.